박태선 장로를 직접 본 사람들의 증언 모음 -1-

2021. 4. 21. 17:27과거이슈

본 게시글은 천부교의 교주 박태선을 직접 본 사람들의 의견(경험담)을 모아서 그의 실제 일화를 알아보고 진위여부를 알아보자

 

 

 

박태선 장로를 직접 본 안종성 씨 경험담

향기를 맡았던 안종성 씨는 1960년대 당시 초등학교 선생님이었고 가르치던 제자가 계속해서 전도관에 나가자고 졸라대어 충남의 작은 전도관에 나가보게 되었습니다. 3번 정도 나갔을 때, 아주 좋은 향기가 나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화장을 하고 향수를 뿌린 사람은 없었는데 표현하기 어려운 감미롭고 좋은 향기가 났습니다.

 

교인들의 권유로 대전 전도관까지 가게 되는데 박태선 장로에게 안찰을 받았고 그 이후로 평소 지병처럼 달고 살던 두통과 불면증이 깨끗이 사라졌습니다.

 

그 이후 서울 이만제단에 참석한 안종성씨는 더 짙은 향기로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알면 알 수록 은혜를 받고 싶은 소망이 간절해져서 교육자의 꿈을 키우게 되었습니다.

박태선 장로를 직접 본 박만조 씨 경험담

삼대가 기독교를 믿는 집안에서 어릴 적부터 집과 교회밖에 몰랐던 박만조 씨는 스무 살 쯤 시집가서 더이상 교회를 나가지 못했었습니다. 1960년 쯤 세 살배기 둘째 아들이 아침마다 눈이 아프다고 보채어서 병원도 가보고 약도 먹여보았지만 차도가 없었습니다. 하루는 우는 아이를 달래고 있는데 맞은편 이영숙 씨가 부흥집회에 가면 환자들이 많이 치유된다며 집회 참석을 권유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일요일에 아이를 데리고 집회장으로 갔습니다. 찬송의 소리와 열기가 가득했던 예배 중 단상 앞에 뽀얀 것이 내려와서 물어보니 이슬 같은 은혜가 내리는 거라는 말을 듣고 예배를 마치고 박태선 장로에게 사정을 말하고 안찰을 받게 되었습니다. 박태선 장로에게 안찰을 받은 둘째는 깨끗히 나았습니다. 병원에서 고치지 못했던 병도 한 번에 치유되니 참 신기하고 감사했습니다. 감사한 마음이 생겨서 그런지 남편과 저는 집과 가까운 전도관에 함께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후로도 셋째 아이가 국통에 빠져 화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저녁이라 병원의 문이 닫혀있어서 전도관으로 뛰어가게 되었는데 생명물을 바르자 발그스름한 빛이 감돌았고 시어머니가 효과가 좋다는 약을 가져와서 상처를 뜯어보니 이미 흉터 자국도 없이 아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당뇨를 앓던 남편의 입관 예배에서도 이 향기를 맡을 수 있었습니다. 셋째 아들도 같은 향기를 맡았고 "아버지가 있는 방에 향수를 뿌렸습니까?" 하고 질문을 했습니다. 생명물로 깨끗이 씻긴 후 남편의 병색은 사라졌습니다.

박태선 장로를 직접 본 김신자 씨 경험담

김신자 씨는 1955년 21살에 선교사가 되기위해 전동감리교회에 나갔습니다. 당시 정도선 목사는 일본 신학교를 나왔고 성경에 능통하여 인천 성경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해 가을 경 정도선 목사는 박태선이라는 유명한 장로의 집회에 가보자고 하여 인천 집회와 서울 제2운동장 집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저는 선교사로 일 할 생각이었는데, 박 장로님 집회에 참석한 뒤로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예배 시간에 지독한 냄새가 나더니 그 냄새가 사라지고 아주 좋은 향기가 났습니다. 그때부터 단물이 목으로 계속 넘어와서 집회에 참석한 며칠 동안 밥을 먹지 않아도 배고픈 줄 몰랐습니다.

 

막연히 소설 같던 성경도 하나님의 신이 이슬과 같이 내린다는 구절을 설명할 때 뽀얗게 내리는 성신을 직접 보고 체험하게 되니, 그 구절을 풀어 주시는 말씀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성신을 받고 구절을 깨닫자 '달고 오묘한 그 말씀' 찬송을 불러도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말씀을 깨달을 때 그 맛이 꿀 송이보다 달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6.25 전쟁으로 고아가 많았는데, 200명이 넘는 고아들이 보육원에 있다는 얘기를 듣고 전도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 보육원에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피부병이 심한 아이에게 저녁마다 생명물을 발라주니 진물이 줄어들고 새살이 돋아났습니다. 다른 아이들도 허약하고 자주 아픈 경우가 많았는데, 그중에 피부병이 있는 한 아이가 생명물로 치료되자 다른 보모들도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대부분의 아이들이 전도관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보육원장은 일본에서 신학을 공부한 목사였지만 그의 사모님은 인천전도관에 나오고 그 자녀들도 열심히 다녔습니다.